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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 안 하신 디테일 나왔습니다

'주문 안 하신 디테일 나왔습니다'를 시작하며

20대 중반이 되어서야 시작한 진로 고민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하고 싶어서 무작정 퇴사했습니다. 지나간 학창 시절, 알바 시절, 인턴 시절, 신입사원 시절을 돌아보며 제가 뭘 좋아했고 잘했는지 떠올렸어요. 정확히 말하면, 떠올리려고 애썼습니다.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인지 머리가 나빠서인지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았어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라는 사람이 도대체 뭘 좋아했고 잘했는지 도저히 모르겠더라고요. 소설, 동화, 수영, 이모티콘 만들기, 사진, 영상제작, 사물놀이 등등 얕게 관심이 갔던 것들이나 잠깐 빠져있었던 일들은 많은데 뭐 하나 끈기 있게 깊이 파고든 일이 없었어요. 

 

 '잘한다'의 기준도 너무 모호했습니다.

 

 '나는 국어를 잘했지. 하지만 나보다 시험 점수가 높은 애들은 항상 있었고. 글쓰기도 어려워하지 않아서 상을 여러 번 받았지만 받지 못할 때가 더 많았고. 노래 잘한다는 칭찬을 들을 때도 있었지만 노래방에서 내 노래를 들으면서 아무 말 없이 자기 노래를 예약하던 애들도 많았어.'

 

 

 

답이 안 나오면 질문을 바꾸자

 

 이렇게 떠오른 것들을 하나씩 반박하다 보니 결국 저에게 잘하는 일이라는 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아니 어떻게 특출나게 잘하는 게 하나도 없을 수가 있지? 정말 못났다... 하루하루 스스로의 자존감만 깎아먹고 있다가 문득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나는 무엇에 유난히 예민했을까?

 

 그동안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고, 발표를 하고, 회사에서 일하면서 제가 어느 부분에 가장 신경을 썼는지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동기들과 조별과제를 하거나 팀원들과 협업을 하면서 어느 포인트에서 가장 답답했고, 어떤 부분에 나서서 손을 댔는지를요. 

 

 그러자 몇 개의 장면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나도 모르는 새에 생긴 두 가지 철칙

 

 교육학을 전공하고 교육팀에서 일하면서 자료를 만들 일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수업계획안, 발표자료, 무슨무슨 교육용 PPT, 교육 영상... 이 콘텐츠들은 모두 글을 기반으로 합니다. PPT 슬라이드에는 텍스트가 필요하고, 발표를 위한 스크립트가 있어야 합니다. 영상 기획안과 시나리오는 글로 써야 하고, 글이 중심이 됩니다. 

 

 이렇게 다양한 자료들을 만들면서 저에게는 두 가지 철칙이 생겼습니다. 첫째는 비문 없는 문장을 쓰는 것이고, 둘째는 쉽고 명확하게 쓰는 것입니다. 

 

 

 

철칙 1. 비문 없이 쓰기

 

 읽기와 쓰기를 좋아하는 저는 비문이란 '존재하면 안 되는 악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람들을 웃기거나, 비꼬거나, 풍자하려는 등 목적이 있으면 당연히 일부러 틀리게 써도 되지만 그렇지 않은 일반적인 글쓰기에서는 비문을 없애야 한다고 강하게 믿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맞춤법을 과하게 틀리거나, 문장의 조사를 잘못 사용하거나, 말의 앞뒤가 다르면 일초라도 빨리 고쳐주고 싶어서 손이 근질거렸습니다. 

 

 직장생활을 돌이켜보면 저는 거의 제 주장이 없는 '넵봇'이었습니다. 상사가 "이거 해요" 하면 넵 하고 후다닥 일했고, 동료가 "이거 이렇게 하는 게 어때요?" 하면 "넵 좋아요" 하는, 부려먹기 좋은 사람이었죠. 저희 팀원들은 절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제 기억 속 저는 그런 무던한 사람이었어요.

 

 그런 제가 예민해지는 부분은 바로 문장이었습니다. 동료가 쓴 스크립트, 슬라이드의 텍스트를 볼 때는 늘 제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만약 제 동료들이 저를 넵봇이 아닌 까다로운 사람이라고 기억한다면 아마 이 부분 때문일 거예요. "이 단어보다는 저 단어가 더 적합하지 않을까요?", "이 문장 순서를.. 좀 바꾸면 어떨까요? 이렇게요." 하고 너무 사소한 피드백을 건네는 사람, 그게 저였습니다.

 

 저에게는 그런 것들이 전혀 사소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주 중대했지요. 이런 디테일 하나하나가 살아야 퀄리티 있는 자료가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대부분의 사람은 굳이 그런 것까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도 저같이 디테일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분명 눈치챌걸요?

 

 그냥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기만 했다면 괴로웠을 텐데 다행히 이런 일이 즐거웠습니다. 비문을 잡아내고 고치는 과정이요. 수업을 듣다가 전공 책에서 오타나 비문을 발견하면 줄을 쭉 긋고 그 옆에 정확한 문장으로 고쳐 적는 학생이었으니 말 다했죠. 엉망으로 끼워 맞춘 퍼즐을 다시 와르르 쏟아서 완벽하게 조립하는 기쁨이라고나 할까요. 

 

 누군가는 '쟤는 뭐 저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냐. 누가 눈치챈다고.'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아무래도 평생 그런 '쟤'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철칙 2. 쉽게 쓰기

 

 교육자료든 책이든 영상이든 아무리 좋은 콘텐츠라도 시청자가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주로 교육자료 만드는 일을 했기 때문에, 어려운 내용을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하는 일에 많은 공을 들였어요. 

 

 쉽게 쓰는 비법 몇 가지를 짧게 늘어놓자면 이렇습니다. 한 문장에 하나만 설명하기, 어려운 한자 단어 최대한 쓰지 말기, 영어보다는 쉬운 한글로 쓰기, 비유하기, 애매하지 않고 명확하게 쓰기, 상대방 입장에서 쓰기. 

 

 여러 업무 중 가장 수월하게 했던 업무가 뭐냐고 묻는다면 '어려운 일을 쉽게 풀어내는 작업'이었다고 답하고 싶습니다. 복잡한 계산이나 분석은 못하지만 어려운 작업을 사용자 기준에서 쉽게 설명하는 건 자신 있었어요. 실제로 제가 만든 자료가 제일 쉽고 명확하다는 평가도 받았고요. 

 

 그래서 동료들의 자료에 피드백할 기회가 있으면 더 쉽게 설명할 수는 없을지 고민해서 다른 제안을 내놓곤 했어요. 공동으로 만드는 자료가 있으면 제 의견이 비교적 많이 채택됐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제가 강력하게 우겨서일 수도 있겠네요. 

 

 아무튼 이런 성향을 종합해보면 저는 디테일에 죽고 디테일에 사는, 디테일에 목매는 프로 디테일러였어요. 자, 이걸로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그런 고민 끝에 혼자서 스터디를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시작하는 프로젝트

 

 바로 '주문 안 하신 디테일 나왔습니다' 시리즈입니다. 여러 서비스를 구경하면서 디테일 잔소리를 해보려고요. 누가 "저희 제품 피드백 좀 주세요!" 하고 요청한 것도 아닌데 혼자 잔소리하는 셈입니다. 좋은 포트폴리오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안 돼도 그냥 재미로 해보려고 해요. 

 

 글의 첫머리에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퇴사를 했습니다. 뒤늦은 적성과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어요. '내가 가장 예민한 부분'을 생각해보니 제가 어떤 부분에 신경을 많이 쓰고 뭘 잘할 수 있을지 가닥이 잡혔습니다. 저처럼 뒤늦게 진로 고민을 시작하신 분이 계시다면 한 번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시는 건 어떨까요?

 

당신은 무엇에 유난히 예민했나요?